
러시아 유조선들이 서로 모순되는 위치 정보를 전송해 선박 한 척이 동시에 두 곳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는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이와 함께 러시아의 이른바 ‘그림자 함대’에 속한 유조선 가운데 러시아 국적으로 등록되는 선박이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산 석유를 운송하는 선박에 대한 감시와 단속을 강화한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2026년 8월 27일, 유조선 Pirop의 위치가 서로 다른 두 곳으로 표시되는 현상이 확인됐다. 한 신호에서는 이 선박이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다른 신호에서는 약 800km 떨어진 튀르키예 북부 해안 앞바다에 있는 것으로 표시됐다. 이 사실은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의 2026년 10월 18일자 탐사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올리 밸린저(Ollie Ballinger) 연구원은 흑해에서 허위 또는 조작된 위치 정보를 발신한 제재 대상 유조선을 최소 12척 확인했다. 이 가운데 6척은 같은 시각 서로 다른 두 위치에 있는 것으로 표시됐다. 여러 선박에서 나타난 신호의 유사성은 위치 정보 조작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장비가 사용됐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흑해에서 포착된 허위 위치 정보
상선은 일반적으로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통해 위치와 침로, 속력, 선박 식별 정보 등을 발신한다. 다른 선박과 해안경비대, 해사 당국은 이 정보를 활용해 선박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해상 사고를 예방한다. 국제해사기구(IMO)의 규정에 따르면 AIS 설치 의무가 있는 선박은 원칙적으로 장치를 계속 작동시켜야 한다. 다만 국제 규정에 따라 선박의 항해 정보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예외가 허용될 수 있다. AIS 정보가 조작되면 선박의 실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국제 제재 대상인 해상 운송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한 사례에서는 일부 유조선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동안 AIS 신호를 변경한 정황이 나타났다. 선박의 실제 위치는 해사 당국에 전달됐지만, 별도로 발신된 신호에는 선박이 항해 중인데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으로 표시됐다. 연구진의 관찰 결과는 이러한 수법이 반복적으로 사용됐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누가 이를 주도했는지, 관련 선박들이 모두 동일한 지시에 따라 움직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가능한 설명 중 하나는 선박 운영사들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해상 운송 공격에 대비해 선박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기 어렵게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가능한 동기에 대한 분석일 뿐이며, 개별 선박의 실제 목적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인폼네이팜(InformNapalm)은 과거에도 AIS 정보 조작 문제를 다룬 바 있다. 2021년 10월 발표한 기사에서는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합동 군사훈련 자파드-2021(Zapad-2021)을 둘러싼 허위정보 유포 사례를 분석했다. 당시 조작된 AIS 정보는 러시아 군함 5척이 폴란드 해안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당시 보도에 따르면 해당 군함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기사는 크림반도 주변 해역에서 선박 위치 정보가 반복적으로 조작된 사례도 다뤘다. 당시 사건은 이번에 확인된 제재 대상 유조선들의 사례와 성격이 다르지만, 유럽 해역에서 AIS 정보 조작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러시아 국적으로 등록되는 유조선 증가
유조선의 위치 정보 조작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새로운 분석에서는 러시아 그림자 함대의 선박 국적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Centre for Research on Energy and Clean Air, CREA)에 따르면 허위 국기를 달고 운항하는 그림자 함대 선박은 2025년 9월 말 120척에서 2026년 9월 말 48척으로 감소했다. 여기서 허위 국기란 선박이 특정 국가에 등록돼 있다고 주장하지만 해당 국가의 당국은 그 등록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뜻한다. 그러나 허위 국기를 사용하는 선박의 수가 감소했다고 해서 러시아산 석유 운송에 관여하는 선박의 수도 그만큼 줄었다는 뜻은 아니다.
CREA에 따르면 러시아 국적으로 등록돼 러시아산 석유를 운송하는 그림자 함대 유조선은 2025년 9월 22척에서 2026년 9월 50척으로 늘었다. 이 50척 가운데 34척은 2025년 1월 이후 러시아에 등록됐으며, 그중 25척은 과거 허위 국기를 달고 운항했던 선박이었다. 2026년 9월 러시아 국적 선박이 운송한 석유는 그림자 함대 유조선들이 운송한 전체 석유 물량의 36%를 차지했다. 1년 전 이 비율은 9%였다. 기국별로 보면 러시아 국기를 단 선박이 운송한 석유 물량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인폼네이팜은 이전 조사에서도 선박의 등록 이력을 추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19년 8월 발표한 조사 기사에서는 러시아 흑해함대에 대한 연료 밀수 의혹을 다뤘다. 조사 대상은 과거 Vilga와 Saratov City라는 이름으로 운항했던 유조선 Mriya였다. 이 선박의 등록 이력은 러시아, 시에라리온, 코모로, 우크라이나 등 여러 기국과의 연관성을 보여줬다. 당시 조사는 이번 사례와 다른 선박, 다른 시기를 대상으로 했지만, 의심스러운 해상 운송을 추적할 때 선박의 이름과 국적, 소유관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강화된 단속이 선박 등록에 미치는 영향
이러한 변화는 유럽 연안국들이 등록 정보가 부정확하거나 위조됐을 가능성이 있는 선박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CREA는 허위 국기 사용이 크게 감소한 배경으로 각국 당국의 단속과 선박 등록부를 관리하는 국가기관들 사이의 외교적 협력 강화를 꼽았다. 등록 정보가 사실과 다른 선박은 운항이 지연되거나 당국의 단속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운항을 계속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면 러시아에 정식 등록된 선박의 기국은 러시아다. 이러한 등록 자체가 국제해양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해당 선박과 러시아의 관계는 이전보다 분명해진다. 이는 복잡한 등록 이력과 소유구조, 상업적 관계 때문에 실제 운송 주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과거의 방식과 차이가 있다.
제재에도 계속되는 러시아산 석유 운송
유럽연합(EU)은 러시아산 석유 수출에 관여하는 선박과 기업에 대한 제재를 단계적으로 확대해 왔다. 2026년 7월 23일 채택된 EU의 제21차 대러시아 제재 패키지에는 선박 41척이 추가로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 그림자 함대 운영을 지원하는 일부 서비스에도 제재가 확대 적용됐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러시아산 석유 수출 물량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제재 대상 선박을 통해 운송되고 있다.
CREA에 따르면 2026년 9월 러시아의 전체 해상 석유 수출 물량 가운데 57%가 제재 대상인 그림자 함대 유조선으로 운송됐다. 원유만 따로 보면 그 비율은 67%로 더 높았다. 동시에 상당한 양의 러시아산 석유제품이 주요 7개국(G7) 또는 그 협력국에 소재한 기업이 소유하거나 보험을 제공하는 선박을 통해 계속 운송됐다.
러시아의 석유제품 수입에서도 제재 대상 선박의 이용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인폼네이팜은 2026년 10월 8일 발표한 기사에서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 항만에서 러시아로 향한 연료 운송 사례를 다뤘다. 2026년 7월과 8월 유조선 7척이 한국 항구에서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운송한 석유제품은 17만 6,000톤을 넘었으며, 대부분은 경유였다. 이 선박들은 모두 14차례 항해했고, 그중 3척은 서방의 제재 대상이었다. 이 운송은 러시아의 석유제품 수입에 해당하므로 러시아의 석유 수출과 구분해야 한다. 다만 제재 대상 선박이 러시아의 연료 공급망 내 다른 분야에서도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의 석유 운송이 그림자 함대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준다. 운송에는 소유관계와 보험 방식, 법적 조건이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선박이 투입된다. 따라서 제재의 효과를 평가할 때는 제재 명단에 추가된 선박의 수만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제재를 넘어서는 해상 안전 위험
그림자 함대의 활동은 항해 안전과 해양환경 보호 측면에서도 우려를 낳고 있다. CREA에 따르면 2026년 9월 그림자 함대 유조선들은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을 총 121차례 운송했다. 이 가운데 54건은 선령이 20년 이상인 선박을 통해 이뤄졌다. 선박이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안전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정비가 부실하거나 보험 보장이 충분하지 않다면 사고 발생 시 피해가 더욱 커질 수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책임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은 선박의 경우 기름 유출 사고에 따른 방제 비용과 환경피해 복구 비용을 충당하는 일도 어려워질 수 있다.
조작된 위치 정보 역시 추가적인 위험요인이다. 선박의 실제 이동 경로에 관한 정보가 신뢰할 수 없다면 당국이 선박의 운항을 감시하거나 필요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개입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그림자 함대 문제는 경제와 안보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연안국들이 국제 해역에서 항행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지와도 직결된다.
변화하는 러시아 그림자 함대
최근 확인된 자료는 러시아의 해상 석유 운송에서 두 가지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허위 국기 사용은 크게 줄어든 반면, 그림자 함대 유조선 가운데 러시아에 정식 등록되는 선박은 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연구진은 흑해에서 위치 정보를 조작한 것으로 의심되는 제재 대상 유조선 여러 척을 확인했다.
다만 이러한 변화들이 모두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CREA의 통계는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한 유조선 12척보다 훨씬 광범위한 그림자 함대를 다룬다. 그럼에도 이 자료들은 국제 제재와 당국의 감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러시아산 석유의 해상 운송 방식이 계속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 연안국들로서는 앞으로 유조선이 어느 나라 국기를 달고 운항하는지만 확인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선박의 실제 소유주와 운영 주체가 누구인지, 어떤 보험에 가입돼 있는지, 발신된 위치 정보가 실제 항해 경로와 일치하는지까지 확인하는 일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안드리 리시친(Andrij Lisitsyn)이 인폼네이팜(InformNapalm)을 위해 이 기사에 사용된 자료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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